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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시작점에서

일 년 전 2020년의 시작점에서는, 결국 연말이나 연초라는 것은 임의적이기 때문에 늘어지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 해를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전 해에는 회사가 뉴욕 지부를 만들면서 있었던 이런저런 힘든 일도 정말 많았고, 출장도 너무 많아 몸도 정신도 많이 지쳐있던 상황이라 과거의 일을 돌아볼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찾아온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삶의 변화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다이나믹하고 남았던 한 해를 여유와 함께 마무리하고 싶어졌습니다. 2021년으로 날짜가 바뀐다고 바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희망의 시작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동안은 되돌아보는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작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한번 되짚어보고, 올 한해는 어떤 한 해로 만들고 싶은지 짧게 적어보고 싶습니다.

사진

청계사, 2020년 2월

청계사, 2020년 2월

Smeltz, 2020년 6월

Smeltz, 2020년 6월

아차산, 2020년 10월

아차산, 2020년 10월

밀도 청담, 2020년 12월

밀도 청담, 2020년 12월
iPhone 12 Pro

원래라면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보니 작년에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쓰고, 근처의 이곳저곳의 사진을 찍고, 이따금씩 Instagram에 공유하곤 했습니다. 휴대폰을 몇년간 바꾸지 않았기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닐 이유가 있었지만, 올해 새 휴대폰(iPhone 12 Pro)로 바꾼 이후 휴대폰으로 찍는 사진도 멋지게 나와서 동기부여가 사라질까 걱정이네요.

올해 하반기에 여행을 다시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여행을 가서 기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도, 그 이전에도 일상과 멀지 않은 곳에서 어떤 것을 사진으로 담아낼지 고민을 더욱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

KORG D1 피아노

10년쯤 전 디자인과 개발을 업으로 삼고 난 이후 몇 년간은 취미로 개발만을 잡고 있던 때가 있습니다. 나름 다른 분야를 연구해보면서 재미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모니터에 앉아 타이핑하면서 머리를 갸우뚱하는 일을 회사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하니 기분 전환은 딱히 되지 않았죠. 나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피아노를 몇 년 전 다시 잡게 되었고, 지금은 사진과 더불어서 흥미를 느끼는 취미생활이 되었습니다. 체계적인 교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중학교 이후로는 피아노를 접할 기회가 없어지다 보니, 손은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어 있었고 간단한 악보를 눈으로 읽으면서 연주하는데도 오랜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연습하기에 너무 피곤한 나날도 많았고, 처음부터 원하는 수준의 멋진 악보를 연주할 수 없어서 재미를 다시 붙이는데 시간이 꽤 걸린 것 같아요. 학생 시절부터 그리 길지 않은 손가락 때문에 악보를 고쳐야 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 흡족합니다. 올해는 어레인지나 작곡도 기웃거리고 싶고, 좋아하는 곡을 더 많이 연주해보고 싶습니다. 자신감이 어느 정도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수준까지 노력을 해 보아야죠.

개발

회사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개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진 않지만, Ruby 기반의 자잘한 기능 개발은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감을 놓치기 시작하면 구조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하반기에는 중요도가 높은 프로젝트가 급작스럽게 생겨서 새로운 코드베이스에서 시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구조를 잡고, 백엔드를 만들고, Terraform, Packer, Google Cloud Run를 사용해 배포 파이프라인을 구축하였습니다. 고성능, 그리고 고가용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가볍게 아키텍처를 구성할 수 있었고, 또한 프로젝트 종료 이후 실제 트래픽으로 테스트를 해볼 기회가 생겨서 검증까지 바로 해볼 수 있던 좋은 프로젝트였네요.

개인적으로는 일을 무작정 벌이기보단 유지보수에 신경을 쓴 한 해가 되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지인의 블로그를 Textcube에서 WordPress로 마이그레이션한 일. 인코딩 문제, 리디렉트 처리, 관리자 댓글 매핑, 갤러리 치환자를 WordPress 형식으로 변환하는 등 기존 가져오기 플러그인에서 지원하지 않는 데이터 형식을 변환하기 위해 정규식과 여러 스크립트를 가지고 머리를 끙끙대었던 기억이 납니다.

블로그를 옮기는 김에 서버도 옮기고 싶었고, 시간을 조금 할애하여 결국 이전 작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개인 서버로 Linode를 쓰고 있었는데, 국외 트래픽이 줄기도 했고 성능을 조금 희생하면 국내에 리전이 있는 Lightsail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렴한 인스턴스를 사용하면 성능 문제가 종종 있다고 하지만, 지인의 블로그와 여러 사이트가 있는 만큼 넉넉한 사이즈의 인스턴스를 선택하니 큰 성능 문제 없이 만족스럽게 이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사소한 일로는, 사실상 방치 상태이던 followmyfootprint 프로젝트의 Ruby 버전을 2.4에서 2.7로, Rails 버전을 4.1에서 Rails 6으로 올린 것이 있고, 개인 미러에서 Archlinux ARM 저장소 미러링을 시작했고, TimescaleDB와 Fluent Bit에 흥미를 느껴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 몇 년 동안은 전처럼 구글/AWS 등의 여러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활발하게 하지 않다 보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인상 깊은지를 덜 공유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올해에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기술과 제품을 연구해보면서 느끼는 깨달음과 시행착오를 블로그에 더 자주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Shakr

회사에서는 2020년도 여느 해처럼 기쁜 일도 있고 아쉬운 일도 있었습니다. 세세한 것들에 대해 다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지만, 기억에 남는 변화와 일들을 적어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일 것입니다. 몇 년 전 메르스 유행 때도 팀원의 안전을 위해서 선제적으로 재택근무 권고, 카풀 등의 조치를 했었는데, 올해도 거리두기 단계의 변화에 따라 한 해의 대부분의 재택근무로 보냈습니다. 미국, 유럽, 필리핀 등 다양한 국가에 팀이 있는 만큼 원래부터 Zoom을 도입하여 사용 중이었고, 출장 중이나 외부 파트너와의 미팅 때 자주 사용했던 만큼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팀에게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정신적인 피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과정은 분명히 고된 일이지만, 일과 개인의 삶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해지니, 동료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한순간에 없어진 것이죠. 대부분 원룸에서, 아니면 부모님과 한집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하는 팀원이 많다 보니 업무 공간의 분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죠. 재택근무 도중 집중이 너무 되지 않아 사무실에 자주 나오는 분도 생길 만큼, 이 정신적인 피로가 모두를 갉아 먹는 한 해였습니다. 생산성의 저하는 이러한 스트레스의 중요함에 비하면 비교적 크지 않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고 평소보다도 열심히 노력한 많은 팀원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로는 부족할 것 같지만, 정말 고생하셨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변화 중 하나는 출장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점입니다. 2019년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해외 출장을 가고, 출장의 대부분이 뉴욕 등 정반대의 시간대 지역이다 보니 생체 시계도 망가지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 자체에 싫증이 나곤 했습니다. 출장을 가서 머리를 맞댈 수 없어서 일의 효율이 떨어진 점도 분명 있겠지만, 작년에 비행기 디톡스(?)를 충분히 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았습니다. 다음 여행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되면 두근두근할 것 같아요.

2020년 1월, 코로나19 전 마지막 출장(ICN-TYO-LAX-ICN). 얼굴 피부가 갑자기 갈라지는 문제로 예정보다 며칠 일찍 귀국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 출장이자 해외 여행이 되었다.

2020년 1월, 코로나19 전 마지막 출장(ICN-TYO-LAX-ICN). 얼굴 피부가 갑자기 갈라지는 문제로 예정보다 며칠 일찍 귀국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 출장이자 해외 여행이 되었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사무실을 옮기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 사무실에 상주하고, 아무래도 오랫동안 팀과 같이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동산 업체 선정과 조사를 도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세히 알아보았지만, 중간에 예산이나 다른 조건이 갑작스럽게 180도 바뀌고, 팀원들의 꽤 높은 기대치와 불안, 그리고 저 자신의 기준치를 합리적으로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어려움마저 더해져 큰 좌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팀원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 과정도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를 하면서도 나름 만족할 수 있는 사무실을 패스트파이브 삼성4호점에 얻었습니다. 패스트파이브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단독형 오피스 지점이었는데, 관리 등을 전담해주고 하나의 층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라 공유 오피스와 일반적인 사무실 건물의 장점을 합친 형태라 좋았습니다. 나중에 공유 오피스와 단독형 오피스 등에 대한 생각을 더 자세히 적어보고 싶네요.

공사중이던 사진. 이때까지는 공간이 너무 작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부 가구나 소품이 맞춤형으로 들어가다보니 생각보다 가용 공간이 넓었다.

공사중이던 사진. 이때까지는 공간이 너무 작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부 가구나 소품이 맞춤형으로 들어가다보니 생각보다 가용 공간이 넓었다.

Zoom Rooms를 설치해서 원터치 화상 회의실로 운영 중. 양 옆에 잠수함 창문처럼 보이는 것이 화이트보드다.

회의실. Zoom Rooms를 설치해서 화상 회의실로 운영 중. 양 옆에 잠수함 창문처럼 보이는 것이 화이트보드다.

우리 회사 전용 키친. 커피 원두는 타협할 수 없어 빈브라더스와 직접 계약하여 납품을 받고, 다른 비품은 패스트파이브에서 100% 관리해주신다.

우리 회사 전용 키친. 커피 원두는 타협할 수 없어 빈브라더스와 직접 계약하여 납품을 받고, 다른 비품은 패스트파이브에서 100% 관리해주신다.

아 참, 여름 즈음 한 달 정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재학 중에도 외주 프로젝트를 계속 받아서 하고, 졸업 이전부터 회사의 일을 하기 시작했으니 방학 느낌의 진정한 휴식을 가져본 적이 없더라구요.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도 있고, 보다 많은 생각을 하며 쉬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져서 그동안 해보지 못한 휴식을 가졌습니다. 역시나 아무 고민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니 4주라는 시간은 정말정말 빨리 지나갔고, 휴식 자체가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지만, 그 이후로는 조금 더 삶에서 여유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원하는 만큼 휴가를 갈 수 있는 회사의 문화 덕에 팀원분들도 보통 연차보다 많은 휴가를 가곤 하지만, 몇 년 열심히 달려왔다면 짧게 여러 번 휴가를 가는 것 이상의, 흔히 ‘리프레시 휴가’ 라고 부르는 장기 휴가를 장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선례(?)를 만든 이후 동료가 비슷하게 한 달 리프레시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구요.


2020년 11월

2020년 11월
iPhone 12 Pro

2021년의 시작점에서

작년은 집에 있는 시간이 늘고, 밖을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현실, 그리고 다사다난한 2019년의 고민이 계속되는 것까지 더해져 고민에 빠져서 보내게 된 한 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2020년의 상황이 스트레스를 준 건 아닙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학업을 끝낸 이후 몇 년 동안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고, 출장과 회사의 프로젝트, 그 외 여러 가지 일 사이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찾아오면서 강제로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고, 그로 인해 그동안 미뤄왔던 고민을 마주하고, 고민에 대해 솔직해지는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커리어 발전, 취미 생활, 여러 가지 기술 및 개발 테크닉에 대한 연구… 내가 혼자 있는 시간에도 적당한 게으름과 적당한 집중을 유지하면서 달릴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회사 일 적으로는.. 다른 시간대의 팀원이나 파트너와 이야기를 하는 건 여전히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언어의 장벽은 여전하고, 로드맵의 장기적인 비전과 엔터프라이즈 고객의 즉각적인 필요를 조율하는 것은 더 어려우면 어려워졌지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은탄환과 같은 해결책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2021년 올해에도 이따금씩 숨이 턱 막혀올 순간이 종종 생길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럴 때 그동안은 저의 감정을 절제하고 앞으로 전력 질주하는 데에만 신경 썼다면, 작년부터는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올해도 이러한 과정에서 제가 지치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노력해보아야겠네요.

모든 분들에게 어려웠을 2020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1년은 덜 어려운 한 해로 만들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