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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ku lee

남해 그리고 613여관

09 Jun 2016

2016.02.20 - 2016.02.21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

애플 워치를 내일 당장 가지고 싶어서, 멀리 있는 지인이 보고 싶어서, 아니면 단지 무료한 주말을 보내기 싫어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작년에는 갑작스러운 여행을 자주 다녔다. 대부분 행선지는 가까운 일본이었고, 주말을 끼고 1박 2일로 가는 경우도 있었고 애플 제품을 사 오기 위해 당일치기로 간 적도 있었다. 다만 비행기 표를 저렴하게 구매하기 어려워지는 성수기가 오기 시작하면서 횟수가 많이 줄고, 가끔씩 일주일 정도 되는 긴 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회사에서 바쁜 시기도 막 끝나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2016년 초. 주변에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마침 회사를 같이 다니는 동료도 일본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던 시기였다.

0일차 밤 - 어디로, 언제, 어떻게

주말이 다가오면 으레 그렇듯이 2월 19일 금요일 저녁에도 어떻게 하면 주말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바쁜 한 주를 마치고 나니 취미로 조금씩 손을 대던 개인 프로젝트를 할 만한 기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무언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불현듯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여행을 가자”

마침 개인적으로 고민하던 것도 많던 시기였기에, 여행을 가자는 생각을 시작하니 그저 어디로 가서 뭘 할지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아무래도 급하게 계획을 짜기도 했고, 큰 부담 없이 떠나고 싶어서 해외 여행을 가기보다는 국내 여행을 가고 싶었다. 부산은 이전에 근로자의 날을 맞아 무궁화호 야간 열차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고, 대전은 플레이버거 등 가고 싶은 음식점이나 카페는 몇 군데 있었지만 마땅히 돌아볼 곳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제주도는 차가 없으면 아무래도 이동에 제약이 많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여행지는 주말만으로 갔다 오기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었다.

그러던 중 남해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여러 관광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613 여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숙소를 고를 때 고려하는 요소 중에 가격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곤 하지만, 호텔의 지향점이나 호텔이 위치한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건축 양식도 적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근처 관광지의 특징을 반영하여 머무르는 적은 시간동안 인상 깊은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 한국에서는 일본의 료칸처럼 특색이 있는 숙박 업소를 찾기란 쉽지 않은데, 그래서 페이스북의 케이스 스터디와 건축 잡지를 통해 알게 된 613 여관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반적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펜션이 많을 법한 남해의 상주 해수욕장 바로 앞에 수려한 미관을 가진 숙박 업소가 있다는 사실이 꽤나 특이했고, 같은 디자인 없이 하나 하나 특징을 가지고 디자인된 방이 있다는 것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한 몫 했다.

숙박 예정일 바로 전날, 밤 10시부터 여행 계획을 급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이 되고, 보통 당일 예약의 경우 받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내심 초조해져서 지하철 역사 한복판에 멈춰 휴대폰으로 호텔 예약을 시작했고, 오후 11시 반쯤 펜션 예약 앱을 통해 예약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약을 할 때 사용한 애플리케이션에서 숙박업소를 통해 꼭 방이 남았는지 확인을 하라는 메시지가 떴고, 불안한 마음에 613 여관에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인데다가 호텔처럼 리셉션 데스크가 24시 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화를 받으실 지도 반신반의했고,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는지 두 번의 전화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보자는 생각에 전화를 다시 걸었고, 긴 연결음 후에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를 걸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늦은 시간이기에 먼저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내일 하루 묵고 가도 될 지를 조심스럽게 여쭤보았고, 다행히도 가능하다는 대답을 해 주셨다. 긴장이 풀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고, 교통편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남해는 기차역이 없다 보니 부산처럼 KTX 직통열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여러 교통수단을 검색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경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 서울-남해 (직통 고속버스 이용, 4시간 30분 소요)
  • 서울-진주-남해 (KTX 및 버스 이용, 5시간 소요)
  • 서울-부산-남해 (KTX 및 버스 이용, 5시간 30분 소요)

서울에서 5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남해에 가기는 싫어서, 진주로 KTX를 타고 간 후 버스로 남해를 가기로 결정했다. 서울-부산 KTX와는 달리 진주로 가는 KTX는 운행 빈도가 꽤 적었다. 아침 일찍 진주에 도착하려면 오전 5시 45분 차를 타고 출발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오전 3시 쯤에 잠이 들어 5시에 일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에라 모르겠다, 라는 생각에 5시 45분 티켓을 덥석 예약하고 얕은 잠에 들었다.

1일차 아침 - 서울에서 부산까지

상쾌한 기분도 잠시,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 잠이 확 깼다. 설마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보니 오전 5시 20분. 지금 바로 씻고 나간다고 해도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면 5시 40분, 놓치지 않고 기차를 탈 확률은 매우 낮았다. 위약금을 내고 기존 티켓을 취소한 후 조급한 마음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위에서 생각한 여러 가지 이동 방법중에 서울-부산-남해 로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는 자주 열차가 있기 때문에 출발 시간에 대한 걱정이 비교적 적었고, 부산에서 남해로 가는 직통 버스도 자주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행 KTX 티켓을 구매하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버스 첫 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가장 빠른 6시 25분 KTX를 타고 출발하려면 택시로 이동을 해야 했다. 짐을 싸기 전에 카카오택시를 이용해 택시를 호출하고, 내려가서 바로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역

평소에 북적이던 서울역의 풍경에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른 아침의 조용한 서울역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공항철도를 타고 공항에 가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들고 온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대부분의 음식점은 문을 닫았지만, 서울역 중앙에 있는 맥도날드와 롯데리아는 문을 영업을 하고 있었다.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열차에 탑승했다.

9, 10번 플랫폼

2시간 반 가량의 여정동안 일부 정차역에서 깬 것을 제외하고서는 쭉 잠을 잘 수 있었다. 일반석에는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특실로 예약했는데,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터라 부족한 잠을 편안하게 보충할 수 있었다.

부산역

부산에서 남해로

반쯤 잠이 깬 상태로 부산에 도착했다. 시간은 아직 이른 9시. 부산에 온 만큼 부산의 대표 음식인 돼지국밥을 먹고 이동하고 싶었지만, 아직 점심 시간이 되지 않은 애매한 시간이라 바로 이동했다.

사상역 역사에서 나와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가니 부산 서부버스 터미널 건물이 나왔다. 비교적 작은 터미널이었지만 지방 곳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남해로 가는 티켓을 구입하고 보니, 별도의 좌석 지정이 없는 선착순 착석 티켓이었다. 아무래도 버스가 자주 다니기도 하고, 만석이 되어 좌석을 정해주어야 할 만큼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그런 듯. 승차장에서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하였다.

버스 안

버스를 가득 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승객이 꽤 있었다. 남해를 가는 승객도 있겠지만, 진교나 진주 등 중간에 경유하는 터미널을 가는 승객도 몇몇 있는 것 같았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도 있고, 버스 안에서는 할 게 마땅치 않은만큼 졸다 깨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약 2시간 반의 이동 후에, 남해 공용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크기가 작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볼링장 등 여러 시설을 겸하고 있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터미널이었다. 독일마을에 가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지만 허기진 배를 조금아나마 채우려고 터미널 안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여행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근처에 거주하시는 지역 주민분들인 것 같아 살짝 어색했다. 김밥이나 우동 등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를 팔고 있었는데, 그 중 칼국수를 시켰다. 3,500원이라는 간단한 가격대라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해산물이 들어간 나름 본격적인 칼국수가 나왔다.

터미널 안의 작은 식당

어디까지나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은 613 여관이었지만, 이왕 남해에 온 겸 주변을 둘러보자 싶어서 전날 찾아둔 관광지 중 어디를 갈 지 고민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남해의 관광지는 독일마을, 원예 예술촌, 휴양림 등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독일마을과 바다 정도를 구경하고 싶었다. 주변 풍경도 볼 겸 아래와 같이 섬 한 쪽을 빙 돌아보는 계획을 세웠다.

  • 버스를 타고 남해 독일마을로 이동
  • 점심 식사
  • 버스를 타고 물미해안도로를 경유, 미조항으로 이동
  • 미조항에서 버스를 타고 상주면 613여관으로 이동

무인 티켓 발매기에서 물건-미조행 버스 티켓을 끊었다. 남해 버스는 티머니 등 교통카드 사용이 불가능한데, 터미널에서는 티켓을 끊어서 탑승할 수 있다고 해도 버스 정류장에서 탑승할 때는 티켓을 끊을 수 없으니 어떻게 돈을 낼 지 궁금했다. 유인 발매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카드 등은 역시 사용이 불가능하고 현금을 기사님께 직접 주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보통은 현금을 쓰지 않고 카드로 대부분의 결제를 해결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현금을 가지고 와서 다행이었다. 근처 슈퍼에 들러서 음료수를 사고 천원 지폐 여러 장을 받아 두었다.

플랫폼에 가서 잠시 기다리다 버스에 탔다. 여행을 온 것 같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 주민 분이셨다. 버스의 경우 일반적인 버스 차량이 아닌 관광용 고속버스를 사용했고, 내릴 때는 기사님이 어디에 곧 도착한다고 알려주시는 걸 듣고 내린다고 이야기를 하면 정류장에서 멈추는 방식이었다. 동네 주민들로 분주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을 이동해서, 첫 번째 목적지인 독일마을에 도착하였다.

남해 독일마을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되었던 교포들이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살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남해에서 적극적으로 개발을 하여 사람들이 꽤 많이 찾는 관광지로 알려지고 있다고 하는데,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이왕 남해에 온 김에 들릴 겸 해서 방문하였다.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독일 음식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입구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본격적으로 독일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독일마을

독일마을 2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있고,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로 개조해서 사용되고 있는 집들도 몇몇 있었다. 실제 유럽의 건축물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진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디자인의 건물들이 이색적이었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정상에 도착하니 관광 안내소를 비롯해 기념품 상점과 독일 음식점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바이로이트에 들어가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혼자 오는 사람은 드물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요리가 2인 기준이었다. 고를 수 있는 요리는 많지 않았는데, 간단하게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를 시켜서 나름 맛있게 먹었다.

물미 해안도로

점심식사를 끝내고 슬슬 독일마을을 나왔다. 정류장 근처 커피숍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물미 해안도로를 거쳐 미조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여행을 오기 전 인터넷 검색으로 남해의 볼거리를 찾아보던 중 눈에 띈 것이 바로 물미 해안도로인데, 바다와 맞닿아있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보면서 다음에 운전면허를 따면 꼭 드라이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면허가 없어서 가 볼 수 없겠구나 생각하던 와중, 마침 해당 코스를 지나가는 버스를 찾아서 버스를 타고 체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직접 운전을 한 것이 아니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탁 트인 경치는 구경할 수 없었지만, 중간중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닷가의 풍경은 다음에 이 곳을 다시 오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미 해안도로

미조항, 그리고 613 여관으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미조항. 아직 겨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날씨에 세찬 바다 바람이 더해져 꽤나 쌀쌀했다. 사람이 북적대는 여름 바다와는 다른, 겨울 바다만의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미조항

원래는 미조항에 도착하여 바다를 따라 산책을 할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 데다가 버스 막차를 놓칠 수도 있어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약 30분 후 마지막 버스가 도착하는 상황이었는데, 조금 더 빨리 숙소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였다.

버스를 잘못 타고 미조항으로 진입한 관광객을 많이 만나셨는지, 택시 기사님이 넌지시 어떻게 하다가 미조항까지 왔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어제 급작스럽게 여정을 계획해서 오늘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드리니, 혼자 오는 관광객도 없을뿐더러 비수기에 찾아온 내가 꽤나 신기한 눈치셨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관광이 비교적 힘들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일 택시로 근처 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으면 연락해 달라는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달리던 중, 613 여관의 주인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택시를 타고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니 차를 몰고 마중나갈 걸 아쉽다고 하시며 곧 뵙겠다는 말을 하셨다. 아직 숙소에 도착하기 전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보통 호텔에 묵게 되면 리셉션 데스크의 직원 분과 간단한 대화 정도만 나누게 되는데, 이런 전화는 마치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숙박 전부터 도움을 주곤 하는 경험이 떠올라서 좋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택시는 613 여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여관 쪽으로 걸어가니 입구 쪽에서 걸어오고 계신 주인장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여관 근처의 횟집에서는 혼자서 저녁을 해결하기는 힘들 테니,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하셨다. 나도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하고, 주인장님을 따라 여관 안의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613 여관

여관의 정면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는 커피 머신을 비롯해 식탁 몇 개와 주방을 볼 수 있는 바 테이블이 있었다. 반대편으로 크게 나 있는 창문 저 멀리로는 상주 해수욕장이 보였다. 주인장님은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커피가 아닌 유자차를 권하셨고, 마침 무언가를 마시고 싶었던 터라 감사히 받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쓰게 될 102호의 방 키를 준비해 주셨고, 짐을 풀기 위해 숙소로 올라갔다.

102호

102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근처 건물들과 완전히 다른 느낌의, 높은 층고를 가진 방이 나타났다. 오래된 가정집과 펜션으로 가득한 마을과 대비를 이루는 인테리어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짧게 하루 다녀오는 여행이 목적인만큼 캐리어나 무거운 가방 대신, 평상시에 들고 다니던 가방에 간단히 갈아입을 옷을 챙겨온 가방을 풀고 간단히 씻었다.

상주리에서의 저녁

계획 없이 이렇게 먼 곳 까지 찾아오는 게 유별나다는 생각은 했지만, 613 여관에 혼자 온 남자 여행객은 내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꽤나 놀랐다. 하긴, 대중교통으로 방문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하고 펜션을 예약하는 대상이 주로 친구들이나 연인들인 걸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

약 10분 정도를 걸어서 한 횟집에 도착했다. 여관 주인장님과 음식점 사장님은 꽤 친한 눈치인 듯, 식당 한쪽의 방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주문한 메뉴는 역시 회. 여러 가지 해산물로 만든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하고, 잠시 후 본 메뉴인 회도 나왔다. 보통은 회를 먹을 기회가 없고 부모님과 본가 근처 수산물 시장에 가서 일년에 몇 번 먹는 편이었는데, 역시 바다 근처에서 먹는 회는 맛도 기분도 남달랐다.

여행을 오기 하루 전 했던 전화부터, 혼자 이 먼 곳 까지 찾아온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으셨는지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셨다. 처음에는 건물의 건축 양식을 둘러보기 위해 방문한 건축학과 학생인 줄 아셨다는 말을 너스레 덧붙이셨다. 원래 혼자, 그것도 갑작스럽게 여행을 가는 걸 좋아하고 건축에 관한 지식은 없지만 멋진 건축 양식에 흥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니 공감하는 눈빛을 보내셨다. 지금 개발 쪽 업무를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지금 있는 회사는 어떤 곳인지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했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힘든 그동안의 고민도,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 덕분에 오히려 술술 풀어놓을 수 있었다. 고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가 처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눈 녹듯 누그러졌다.

즐거운 식사와 대화를 마치고 다시 102호로 돌아왔다. 휴식을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온 만큼 늦게까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오늘 찍은 사진을 간단히 정리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더블 침대

2일차 아침 - 613 여관의 아침 식사, 그리고 바다

따뜻한 난방과 포근한 침대 덕분이었는지 아침 일찍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한 후, 식사를 하기 위해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아침 식사 메뉴는 남해산 활전복으로 만든 전복죽. 어제 밤에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활전복을 보여주셨는데, 바로 그 전복으로 만든 죽이었다. 뷔페식으로 나오는 호텔 식사들은 아무래도 뷔페식이다보니 생각보다 많이 먹게 되고 그 후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많은데, 휴식 후에 속을 풀어주는 전복죽은 정말 반가운 아침 식사 메뉴였다.

613 여관의 카페테리아

전복죽

체크아웃을 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상주 해수욕장을 보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향했다. 카페테리아의 창문으로 바다가 바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얼마 걷지 않아 해수욕장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외로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근처 펜션에서 하룻밤 묵고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인 듯 했다. 해수욕장 한켠에는 사륜 오토바이를 빌려서 경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주 은모래 비치’ 라는 별명처럼 고운 모래와, 붐비지 않는 해변가, 그리고 달리 맑고 투명한 바닷물. 짧은 여정이지만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잠시 시간을 잊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상주 해수욕장

613 여관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기고, 카페테리아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102호의 키를 건네드렸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오는 버스가 오기 전까지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주인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613 여관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은 613 여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잠시 기다리자 남해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613 여관의 낮

버스 정류장

남해에서 대전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남해에서 서울까지 이동을 해야 하기에, 관광지를 가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어딘가에 들러 저녁을 먹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전에 대전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늘 플레이버거를 가곤 했었는데,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대전에 잠깐 들러 플레이버거를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어느새 버스는 남해 터미널에 도착하고, 남해에서 진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었다.

약 한시간 반 정도를 달려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정도의 간격으로 있는 대전행 버스 티켓을 끊었다. 전에 대구를 갈 때 오랜 시간동안 버스를 타 본 경험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꽤 오랜 거리를 여러 버스에 걸쳐 이동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안락한 버스 좌석 덕분에 불편하진 않았지만, KTX를 탈 때보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살짝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약 5시쯤 대전 터미널에 도착해서, 사람으로 가득한 버스를 타고 유성구청 근처에 있는 플레이버거로 이동했다. 유성구청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플레이버거, April & August

플레이버거는 한번 더 이전을 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업무차 대전에 방문했을때는 플레이버거 그린라벨이라는 이름으로 유성구청 맞은편 골목 깊숙히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갔을때는 처음 방문했을때와 같이 큰길가로 다시 위치를 옮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플레이버거의 인테리어가 나타났다.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아서 주로 먹던 더블 더블 버거가 아닌 베이컨 버거를 주문했다.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맛, 이 맛 때문에라도 대전을 다시 찾게 된다.

플레이버거

식사를 마칠 쯤 되니 시간은 6시 10분을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7시 40분에 출발하는 ITX-새마을 열차를 타야 했는데,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 시간을 맞출 지 확신할 수 없어서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택시로 이동하면 시간적인 여유가 약간 생겨서 카카오택시로 호출을 미리 해 놓고 근처에 있는 April & August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이 커피숍도 플레이버거가 운영하고 있는데, 유성구청 맞은편에는 이렇게 플레이버거가 운영하는 여러 종류의 음식점이 가득하다.

April & August

커피를 마시면서 카카오택시 앱으로 서대전역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택시를 호출했다. 도착하신 기사님은 꽤 친절하신 분이었다. 카카오택시는 우버보다 불친절한 기사님이 오실 확률은 높지만, 우버와는 다르게 기사님들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용하다 보니 국내 어디를 가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꽤 큰 것 같다.

집으로

시간에 딱 맞게 서대전역에 도착했다. 비교적 큰 규모의 대전역과 다르게 음식점 등도 꽤나 적은 작은 역이었는데, 대전역 대신 이 역에 온 이유는 KTX가 아닌 ITX-새마을을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서였다. KTX보다 저렴한 요금에 크게 차이나지 않는 이동시간, 그리고 비교적 최신 열차를 탈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조금은 썰렁한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서대전역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옆 좌석이 내심 비길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내가 탄 칸은 전 좌석이 만석이었다. 그래도 KTX 일반석보다 체감 상으로 자리가 넓어서 편안하게 서울로 올라왔다.

마치며 - 혼자서 훌쩍 떠나기

몇 년 전만 해도 분 단위로 일정을 짜서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관광지를 의욕적으로 다니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여행을 가고 싶어질 때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원했던 건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눈치가 보이고 여러 사람이 갈 때보다 숙박비도 비싸지만,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건 다른 여행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Google I/O 참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을 때 에어비앤비로 한 호스트의 소파를 빌려 며칠을 묵은 적이 있는데, 스타트업에 근무하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와 기술 트렌드와 Bay Area에서의 삶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번에도 그동안 혼자서 고민하고 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여행 후에도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질 때,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때, 다시 613 여관을 찾게 될 것 같다.